전혀 해내지 못했지만 일단 해냈다고 치자.

 

배낭여행을 홀로 떠난다는 것…

 LA. [여행의 설렘과 두근거림, 즐거움]이 [여행 중 예상치 못한 각종 사건사고 및 신체적, 정신적 부담에 의한 스트레스]에게 지기 시작한 첫 번째 과도기이다. 왜 첫 번째라고 적냐면, 이 직후에 간 라스베이가스에서 두 번째 과도기를 겪게 될 예정이기 때문이다…라고 해두겠다. (예상은 했지만 이 시기가 상당히 빨리 왔다.)

 나는 스트레스를 아주 쉽게 받고, 스트레스를 받을 수록 충동 제어를 못 하는 사람이다. 그럼 왜 멀쩡히 여행을 떠나서 정신적으로 고된 이야기나 하고 있느냐? 그 이야기를 꺼내려면, 우선 생존기를 풀어적어야 하는 수준이 되기 때문에 우선은 생존 기록을 남겨볼까 한다.

 로스앤젤레스라는 도시, LA라는 도시는 솔직히 말해 미국 내에서 치안이 굉장히 좋은 곳에 속하는데(처음에는 그게 믿기지 않았지만 순위를 보아하니 현재는 뉴욕보다 치안 안전 순위가 높은 것 같았다) 그게 그나마 나를 지금 살려둔 데 큰 역할을 해주지 않았나 싶다. 내가 조난(?)당한 곳이 LA라는 사실은 나에게 큰 위안을 딱히 주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지는 않았다.

 

 

LA의 교통, 치안

 LA에서 사용하는 것은 TAP 카드이며, 교통 수단에는 모두 이용할 수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가 굉장히 느린 텀을 두고 오기 때문에, 느긋한 마음으로 임하다가는 미아가 되기 일쑤. 조금 뜸한 지역은 버스가 몇십 분은 그냥 기다려야 하는 수준으로 오며, 심지어 그것조차 정확하지 않아서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하거나 말도 안 하고 버스 일정이 취소되는 일도 빈번히 일어난다. 

 쉽게 말해 LA의 교통은… 제법 쓰레기다. 직전에 내가 갔던 곳이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등 교통이 굉장히 잘 닦인 곳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 글은 나의 일정상 LA,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의 바로 밑에 있는 애너하임을 통틀어 적히는데, 애너하임에서는 또 ORCA 카드라는 전혀 다른 교통 수단을 이용한다(시애틀의 그것이 맞다). 그리고 이래서 교통 민영화가 안 된다는 거다. 

 

귀엽게 생겼다.

 

 어디에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북미에는 노숙자 문제가 심각하며 그 중 대부분이 지하철에서 밤을 보내고 싶어한다. 지하철 밖은 정말 춥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유감인 점이 있다면, 나는 그 '지하철에서 밤을 보내고 싶어하는 노숙자'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조난당했다.

 그렇다. 나는 조난당했다.

 

 

Union Station

 이 곳을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처음 내가 버스를 타기로 예정되었던 시간은 9시 15분이며, 나는 9시 30분으로 버스 시간을 착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을 고려해도 몇십 분은 거뜬히 일찍 도착할 수 있도록 예정을 잡았는데, 구글 맵이 무려 30분이나 느린 여행 일정을 표시해준 덕분에 보기 좋게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그 직후의 버스를 끊었을 때도 큰 문제는 느끼지 않았다. 오후 7시에 도착하는 편이면 무난히 LA의 숙소까지 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다가 깨보니 버스에는 큰 기술적 문제가 생겨 있었고, 덕분에 내가 LA에 도착한 시간은 약 11시였다. 원래의 예정보다 3시간에서 4시간 정도가 느려진 상태였다. 당연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잠에 빠질 시기였고, 노숙자들이 블럭마다 즐비한 것은 물론 버스 역시 텀이 굉장히 느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도무지 원래의 숙소까지 이동할 수 없었다. 이동했다간 중간에 칼에 찔려 죽을 것 같다는 선명한 공포가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바로 옆에 있던 지하철역인 'Union Station'에 왔다. 이 역이 닫히는 1시까지 안에서 버티고 있었는데, 중간에 심각한 수준의 총격음이 층 바로 위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난 정말 눈 뜨고 기절한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 알 수 있게 됐다… 옆에 있던 현지인이 불꽃놀이라고 말하며(그게 정말 불꽃놀이였는지 나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한 거짓말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안심시켜주지 않았다면 정말 기절했었을 지도 모르겠다.

 비록 나는 SNS나 카톡으로 친구들과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지내고 있었지만, 진지하게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고작 하루만에 오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여행을 홀로 온 젊은 동양인 여성이며, 막말로 LA에 존재하는 수많은 인간들 중 가장 범죄의 표적이 되기 쉬운 군상에 속한다고 자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외로워하고 불안해하는 동안 끊임없이 말을 걸어주었던 친구들이 정말 고마웠지만, 그 당시 나는 극도의 불안 상태였기 때문에 컨텐츠를 열심히 제공하는 친구들의 톡을 보면서도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1시가 되고 나면, 역이 닫혀서 밖으로 내쫓길 수밖에 없었다. 졸지에 차가운 바람 속에 혼자 짐을 들고 선 나는 어쩔 수 없이 이제 와서라도 체크인을 할 수 없을지 확인해보려 했는데, 주변의 모든 숙소는 방이 다 찼거나 체크인을 받는 프론트가 닫혀 있었으며 그렇다고 그냥 이동하자니 1블록에 평균 3노숙자들이 있는 상황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때 유니온 역을 지키고 있던 메트로 시큐리티의 도움과 자비로, 구석에 있는 그나마 바람이 덜 드는 의자에 누워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사실 나처럼 길을 잃은 여행자들 몇 명이 이곳을 계속 방황하고 있었으며, 시큐리티들이 몇 명씩 교대 근무를 하며 내 곁을 지켜 주었던 덕분에 다행히도 점점 불안은 줄어들었고, 종래에는 아예 곯아 떨어지기까지 했다.

 

당시에 SNS에 횡설수설했던 글... 진짜 쳐자다가 정신차려보니 베개가 생겨 있었다.

 

 여기서 정말 웃긴 일이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어떤 다른 여행자가 내가 안쓰러웠던 건지(ㅠㅠ) 목 밑에 목베개를 넣어둔 것이다… 시큐리티는 그걸 훈훈한 눈으로 봐주고 있었고. 완전히 촌극이었다. 정말 감사했지만, 만약을 대비해 아침이 밝았을 때 목베개는 버리고 왔다.

 원래라면 유니버셜 할리우드 스튜디오에 방문한 뒤 저녁에 느긋하게 애너하임으로 이동할 예정이었지만, 극도로 피곤하고 정신적으로 소모되어 있었던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그날 잡혀 있었던 일정을 포기하고 바로 애너하임행 새벽 버스를 탔다. 핸드폰 배터리도 아슬아슬했던 시점에 버스 → 스타벅스 → 숙소 로비에서 충전을 하며 버틸 수 있었던 건 큰 다행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LA에서 30시간 가까이 초 긴장 상태로 깨어 있었던 나는… 애너하임의 숙소에 체크인을 하자마자 곯아떨어져서 열일곱 시간을 쳐잤다. 지나고 나니 나름대로 추억 보정이 붙어서 자소서에 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다.

 

 

Disneyland - Califorina Adverture Park

 이런저런 난리는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시간은 알아서 흐르고…나는 캘리포니아 어드벤처 파크라는 곳에 갔다.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디즈니랜드의 어드벤처 파크였지만, 막상 가보니 생각보다 금방 돌아다닐 거리가 동나는 느낌이었다. 디즈니 캐릭터들에게 큰 관심은 없고 이것저것 타면서 즐기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큰 나에게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지하게 시간을 오래 보내고 싶고, 나는 '디즈니랜드'를 즐기고 싶지 그냥 놀이공원에 가고 싶은 게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든다면, 어드벤처 파크를 추천하진 않는다.

 

낡은 시테양요. 즐겁긴 했지만 체력이 이미 크게 고갈되었던 후라서 거의 기다시피 돌아다녔다. 미니마우스 모자는 그냥 샀는데...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음. 내 머리가 좀 커서 살짝 낑겼지만(ㅠㅠ)

 

 캘리포니아 어드벤처 파크는 총 7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아직 완공이 되지 않아 계속 공사를 진행중인 구역이 있어서, 7개 구역이라고 하지만 적당히 돌아다니면 컨텐츠가 동 나고 없었다. 나는 인크리디코스터만 네 번 탔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팁이지만, 천하의 디즈니랜드 조차도 8시 정시 출발에는 당해낼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8시를 맞추어 들어갔던 나는 고작 10분의 대기줄로 롤러코스터를 연속 세 번 탑승하고, 기다리지도 않고 애리얼을 구경하러 갔으며, 그 외에도 온갖 사람 한 명 없는 구역을 돌아다니며 관람차도 타고 별 짓을 다 했다. 그런데 대기줄이 없으니까 또 문제인 게, 사람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돌아다니니까 체력이 굉장히 빠르게 고갈된다. 그렇게 내가 지쳤다고 생각했을 때는 고작 10시, 2시간이 지난 때였다…

 

티켓은 스파이더맨이 뽑혔다. 안 그래도 스파이더맨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서 기쁘게 받았다. 걔 줄 거임

 

 어드벤처 파크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꽤나 많은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와 별개로 김빠지는 난이도인 것은 어쩔 수 없다. 에버랜드의 T익스프레스 같은 것만 타다가 인크리디코스터를 타면 버틸만하다…라는 감상 정도가 고작. 그렇다고 재미가 없었냐면 그건 절대 아니었음! 

 너무너무 즐거웠고, 하루 종일까지는 아니고 여덟 시간 가까이를 돌아다니면서 밥도 먹고 이것저것 놀기도 했는데, 확실히 디즈니랜드 내부의 음식 가격은 꽤나 부담이 있는 수준이다(밖이라고 안 비싼 게 아니긴 한데 아무튼). 당연하지만 기념품이나 머리띠도. 디즈니랜드의 명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미키/미니마우스 머리띠는 하나에 29달러, 세금을 포함해 한국 돈으로 치환하면 약 4만 5천원 정도의 가격이 된다. 어마어마하니까 냉정하게 생각해보시길…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 (그리고 중간부터 인간이 너무 많아져서 쫌 힘들었음)

 

 다양한 어트랙션에 탑승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인크리디코스터 (나는 이것만 네 번을 탔다. 다섯 번을 채우고 싶었는데 슬슬 시간이 늦어서 어쩔 수 없었음) 그 다음으로 미키마우스 얼굴이 그려진 흔들리는 곤돌라였다. 

 롤러코스터는 그렇다쳐도 관람차가 왜 기억에 난데없이 남았냐면… 이게 롤.코보다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아니 재미있는 의미로 무서운 게 아니라 진짜 목숨의 경각이 느껴지는 수준의 두려움이었다. 우선 계속 줄이 지지짓대는 소리가 들리는 게 문제다. 사진을 찍자니 흔들리고, 경치 구경을 안정적으로 하자니 관람차가 안정적이지 않고, 그렇다고 스릴이 있느냐 하냐면… 전혀 그냥 목숨의 위협을 주며 흔들릴 뿐임 하지만 롤.코를 타기엔 새가슴이고 그렇다고 회전목마를 타자니 자존심이 상하는 사람, 본인이 용감하다고 자처하지만 사실 조금 겁이 많은 아이들이 타기에 딱 좋은 수준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에겐 그냥 밍숭맹숭했다………) 물론 사진은 안 흔들리는 동안 잘 찍었음!!

 인크리디코스터는 인크리디블이라는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좌충우돌 모험을 체험하는 식의 롤러코스터인데, 대충 우로보로스 급의 능력을 가진 막내 아기가 실종된 것을 찾으러 다니는 스토리로 추정되었다(왜 추정하냐면 정신이 없어서 영어를 하나도 못 들었음). 이 정도 롤.코는 뜬눈으로 치울 수 있어야 히어로를 하는구나 느꼈다. 언젠간 나도 히어로즈 크로스를 달아보고 싶었는데 인생은 멀고도 험하다…

 

마무리는 고통톡으로... (그런데 정신 차려보니 나도 정말 빌런만 찍고 있었음ㅋ 하여간 오타쿠들은)

 

 

Universial Studio Hollywood

 나는 포터모어가 아니지만, 내 친구 중에는 포터모어가 꽤나 많다. 애초에 할리우드 영화들에 별로 관심도 없던 내가 이곳에 굳이 들르기로 한 것은 해리포터 체험관이 대부분의 이유를 차지하고 있었다(실제로 나는 해리포터 체험관만 관람했고, 나머지는 들르기만 했다).

 1권부터 7권까지 이어지는 감동적인 이야기라면 나도 이미 진작 영화로도 책으로도 주행을 마쳤다. 하지만 그 후로 끝없이 이어지는 329479283개의 뇌절, 작가 조앤K.롤링의 각종 쓰레기 같은 혐오 발언, 호크룩스로 온갖 개쌩쇼를 다해가며 고생한 볼드모트보다 오래 산 것으로 밝혀진 호그와트 직행 열차의 과자 파는 할머니 등등의 설정은 나의 영혼을 해리 포터와 격리시켰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미워할 수 없는 좋은 배우들, 어릴 적부터 꾸준히 봐온 마법 시리즈에 대한 추억은 나를 잠깐이나마 돌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내가 무슨 짓을 했냐면.

내가 산 것은 헤르미온느 그레인저의 지팡이. 릿사링이 좋아하는 캐릭터라고 해서 이걸 골라 써보기로 했음!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마법사가 되기로 했다.

 호그와트에 입학하는 나이는 내가 알기로 10살인가 11살인가 12살 셋 중 하나였는데, 대충 내 나이의 절반이다.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세상에는 50대 60대도 대학을 졸업한 채 제대로 된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나이를 잣대 삼는 것은 어른답지 못하다. 만 스물 두 살이 호그와트 입학 좀 할 수도 있지.

 신기하게도 해리포터 체험관에는 마법을 쓸 수 있는 장소가 있어서, 원작 내에 나온 특정 주문을 특정 장소에서 지팡이를 잘 휘둘러 외우면 실제로 마법이 발동되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난 당연히 모든 곳에 마법을 써보았는데, 이게 보기와 달리 굉장히 어렵다. 사진기 비스무리한 게 있어서 그것을 보고 의식하며 최대한 잘 보이게 뚜렷하게, 그러나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게 지팡이를 휘둘러 모양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이게 정말 뻐킹 어려운 것이다. 차라리 프세카 마스터 플립 판정이 이것보다 쉬울 것 같음. 

 내가 몇 번 실패하고 앓고 있는데, 나를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어떤 여자 아이가 내 자리에 서더니 단 한 방에 인센디오를 성공시키고 떠나는 것을 봤을 때 나는 저 아이가 헤르미온느 지팡이의 진짜 주인이라고 확신했다. 1편을 볼 때 론이 해리에게 헤르미온느 재수없다고 뒷담까는 장면이 있었는데, 대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이야말로 재능의 차이다. 평범한 소시민의 입장으로는 질투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반응이 없다. 

 

간지난다.

 

 아무튼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니니 남은 것은 많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극락?이라고 느꼈던 것은 역시 버터맥주였던 것 같다. 말이 맥주라고 하지만 실제 알코올은 (아마도) 안 들었으며, 버터의 부드러운 맛과 톡 쏘는 듯한 탄산이 어우러져 끝내주는 맛을 냈다. 될 수 있으면 또 마시고 또 마시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한 잔에 2만원 가까이 하는 가격을 보고 한 잔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맛있다. 정말 충격적으로 맛있다. 참고로 컵은 그냥 주니까 집에 가져갈 수 있다.

 

 그 외에도 다양한 볼거리들이 있었지만 해리 포터 체험관에서 온 기력을 쭉 빨린 나는 더 이상 무언가 보았다는 느낌을 지속할 여력이 없었다. 그냥 개쩔었다는 감상만 남았을 뿐… 사진은 부지런히 찍었고 추억도 고스란히 남았지만 이 정도면 기록은 충분할 것 같다.

 

 

마치며…

 아무튼 나는 이 즈음부터 이미 '살려달라'고 SNS에 끝없이 빌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리 여행해도 여행이 끝나질 않아…! 여행이 과제처럼 밀려와! 하지만 그렇다고 여행을 그만두고 싶냐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나는 한국에서는 절대 즐길 수 없는 것들을 관찰하고 체험하는 게 무척이나 즐거웠고, 또 행복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체력은 착실히 동이 나고 멘탈은 점점 아방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로스앤젤레스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게 가장 무서운 부분이다. 그건 바로 로스엔젤레스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

 

나는 낡았다. 너무나도 낡아버리고 말았다. 때문에 시테양요 사진을 까먹었음. 내 아이덴티티가...

숨겨진 아름다움…

 아, 아름다운 산 호세! 관광지로 이름이 높은 것 치고 그렇게까지 볼 게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하루 이틀 정도 느긋하게 도시를 돌아다닐 정도의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차후 적을 뮤니시펄 로즈 가든의 분수 사진. 뭔가 저쪽에 넣긴 심심해서 이쪽에...


 산 호세는 분명 아름다운 곳이다. 이는 부정할 수 없다. 그냥 길만 걸어도 꽤나 볼만한 모양새의 아름다운 정경들이 나온다는 점에서, 여행하기에 무척 괜찮은 곳이다. 그래서 나도 많이 돌아다녔고, 특별한 랜드마크에 방문하지는 않았어도 이곳저곳을 들쑤셨으며 맛있는 것도 잔뜩 먹었다. 그래도 그 중 제일 인상 깊었던 곳은 수많은 공원들이다. 산 호세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캐나다 등의 북미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많다. 식물들이 잘 가꿔진 것을 보려면 식물원까지 가야 하는 한국과는 달리 조경이 잘 되어 있는 게 북미의 정원이다.
 그런 아름다움이 특히나 잘 조성되어 있는 게 산 호세라고 난 느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지만, 디즈니랜드보다는 캘리포니아 어드벤처 파크가 좋고 잔잔한 투어보다 번지 점프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다소 심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차라리 여행 친구가 한 명 있어서 사진이라도 왕창 찍었다면 모를까, 나에게 있는 여행 친구라고는 분홍톢기 한 마리와 왠지 일 줄 것 같은 너구리 한 마리 그리고 시테양요 뿐이라…



Winchester's Mystery House

 세계 13대 마경 중 하나로도 유명한 윈체스터 미스터리 하우스는 의외로 김빠지는 일화에 의해 만들어졌다. 윈체스터 가문의 안주인이 지나가는 영매사를 너무 깊이 믿어버린 탓이다. 사라 윈체스터와 윌리엄 윈체스터는 윈체스터 라이플을 생산했는데, 즉 군사력에 협조했는데, 그것에 맞아 죽은 사람들이 워낙 많았어서 저주라도 받은 건지 자식 남편 기타 가족 등등이 빠르게 세상을 떠버렸다고 한다. 그에 따라 원혼들을 피하기 위해 만든 곳이 바로 이 미스터리 하우스라고 한다.

13모양이라는 정원. 가까이 보면 별 다른 점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여기서 믿을 수 있는 교훈은 무려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윈체스터 가문이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저 거대한 집을 지었다 부쉈다 할 수 있었던 것은 돈이 썩어빠지게 많았던 덕이며, 그것은 윈체스터 가문의 사람들이 무기제조업에 임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다. 하여튼 무기는 돈이 된다. 그러니까 군에 비리가 많은 거다. 사라 윈체스터가 윈체스터 라이플에 맞아 죽은 사람들을 진심으로 무서워했으면 그 무기를 팔아 번 돈으로 이런 돈난리를 하지 말아야 했다. 차라리 기부를 하던가 이게 무슨 짓이람…
 두 번째 교훈은 하여간 사람이 기행을 하고 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봐라, 이렇게 기행을 벌인 결과가 이것이다. 내가 만약 죽었는데, 사람들이 내 집을 들쑤시고 다니며 15분에 한 번씩 관광객을 받고 1층에 기념품점을 만들어서 돈을 벌어들이고 있으면 무덤에서 부활해 나올 것 같다. 정말로 공포스러운 일이다.
 윈체스터 미스터리 하우스는 다양한 마경으로 인해 인기가 높은 곳이지만, 그와 별개로 직접 들어갔을 때 투어로는 별로 볼만한 것이 없었다. 투어 가이드가 열심히 안내를 해주긴 하지만 안은 쓸데없이 넓고 복잡하며 내가 귀신이라면 욕을 할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신기한 마경 같은 것들은 대부분 길이 막혀 있어서 볼 수 없고, 그나마 사람 사는 구실을 하는 멀쩡한 곳만 파악이 가능했기 때문에 김빠지는 면이 없잖아 있었다.

사라 윈체스터의 집. 예쁘게 집.꾸도 되어 있다. 영혼이 세상에 있다면 이래서는 안 된다. 이건 뭐 대략 수치의 장이 아닌가...


 물론 지나오는 길에, 문을 열어서 섣불리 나가려 들었다간 창밖으로 떨어지는 죽음의 문? 이나, 문을 열면 벽이 있는 문 (door to nowhere라고 표현하더라) 등등이 있긴 했지만 아무튼 대충대충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투어는 대부분 사람 사는 곳 위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빈티지한 느낌이 살아 있긴 했어도 MMORPG에 등장하는 던전 같은 느낌이 좀 더 강했고, 현실의 마경이라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귀신이 성가셔서 암살을 포기할 것 같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던 걸까 싶긴 하지만, 정작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때 사라가 자신이 만든 방에 스스로 갇혀버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역효과를 낸 것 같기도 하다.

Municipal Rose Garden

 위에 내가 산 호세를 소개할 때, '특히나 정원이 아름다운 곳'이라고 적은 바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뮤니시펄 로즈 가든일 것이다. 이곳은 유명한 랜드마크로도 알려져 있는데, 무려 입장료가 공짜다. 볼 것이 많지는 않지만 잘 관리 되어 있는 장미 정원과 분수의 조합이 마음을 부드럽게 풀어 주었다.

많이 찍었다. 진짜 많이 찍었음.


 특별히 적을만한 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산 호세에서는 별달리 한 게 없어서… 미스터리 하우스를 구경한 다음에 집에 가서는 글을 조금 썼고, 오늘 다녀온 장미 정원 위에 그림을 조금 덧그리면서 느긋하게 샤워 하고 오래 잤다. 예상한 것 이상으로 자버려서 바로 다음 날이 되어버린 게 꽤 슬프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나쁘진 않았다.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실용성 없는 굿즈는 안 산다는 나의 철칙 아래 사진 않았다. 그냥 구경만 했음. 예쁘긴 하더라


 그리고 정말로 나쁘지 않았다. 이 다음 LA~애너하임 글에서 적게 될 것이지만, 내가 이후 무슨 일을 겪게 될 지 생각하면, 이 날 내가 충분히 체력과 금전을 비축해둔 것은 신의 한수를 넘어서 내 목숨까지 살린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이 글은 8월 1일에 적히고 있다. 그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 (미루지 말라고)

 

비행기는 언제 타도 재미있다.

 

"The Security was a shit"

 샌프란시스코로 향하기 위해 비행기를 탈 때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나 7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5시 반에 공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5시 반에 인간이 이렇게 많을 줄 누가 감히 예상했겠는가? 내 가방은 안에 들어 있는 향수 때문에 한 번 검색대에 걸렸고, 이를 확인하는 데 무려 30분이 걸렸다. 그 덕분에 난 7시 비행기를 보기 좋게 놓쳐 버렸고, 나와 같은 비행기를 타려다 지각해버린 다른 사람을 만나 친구가 됐다.
 정말로,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미국의 공항은 일처리가 느리다. 한국 사람들이라면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사람들과 짐, 빛의 속도로 진행되는 검사에 익숙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은 다르다. 미국 사람들은 빨리빨리 한다는 개념이 없다. 사람들은 모두 느긋하게 걸어다니고, 가끔 승객들과 농담따먹기를 하며, 일을 느긋하고 꼼꼼하게 진행한다. 물론 이것이 사고의 확률은 더 낮을 것이고,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준다는 점에는 부정의 여지가 없다. 그래도 한국인의 빨리빨리 정신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큐리티를 거치는 데 1시간 반 이상이 걸려서 내가 지각한 것에 대한 욕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미국 욕을 할 수 없다. 영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 미국 현지인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행기를 놓치면서 계속 저 소제목 같은 대사(Security was shit)를 한 덕분에 비행기를 놓친 사람들은 주문처럼 그것을 외우며 다음 비행기를 찾아 좀비처럼 걸음을 옮겼다. 시큐리티가 거지 같다. 시큐리티가 거지 같다. 시큐리티가 거지 같다…
 심지어 시큐리티만 거지 같은 게 아니었다. 유나이티드 항공에서는 나에게 QR코드 (상담원과 연결시켜준다고 말해 놓고 영원히 상담원이 이를 읽지 않는) 하나만 달랑 준 다음, 알아서 하라고 말하고 떠버렸다. 당연히 방법을 찾을 수 없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또래의, 같이 시애틀 공항에 갇힌 친구 한 명과 영원한 고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우선 QR코드 연락을 시도했다가 되지 않자 옆 부스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SOS를 쳤고, 그들이 다음 샌프란시스코에 가는 항공의 담당자를 찾으라길래 그렇게 했고, 거기서도 답을 찾지 못하자 인포메이션 센터에 갔고,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또 그 똑같은 QR코드를 주고, 그 QR코드 연락이 다시 씹혔고, 마지막 희망의 끈이라고 생각한 유나이티드 항공의 다른 출입구 부스에서 한참을 빈 끝에 새 항공기의 티켓을 얻어냈다. 그 때 나는 2002년 붉은 악마들이 그랬던 것처럼 부스 앞에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부끄러움 따위는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적는 것인데, 만일 security가 shit여서 비행기를 놓쳤을 때는 같은 항공사의 출입구 부스를 찾아가 다음 티켓으로 바꿔달라고 비는 것이 가장 빠르다. 인포메이션 센터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보통은 같은 항공사만이 티켓을 바꿔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함께해준 전우에 대한 예의로 커피 한 잔을 사준 뒤 나는 비행기에서 기절했다. 하지만 나의 고난은 고작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케이블 카 지옥

 샌프란시스코! 본격적인 캘리포니아 주의 진입이다. 캘리포니아는 미국 내에서도 관광지로 이름이 매우 높은 곳 중 한 군데이며, 샌프란시스코는 그 중에서도 유명한 축에 속하는 관광지이다(물론 이름값 자체는 LA가 더 높다고 생각하지만). 미국에서 교통이 제일 제정신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는 장소, 케이블카가 관광 노선으로 지나다니는 도시, 물가가 여전히 제정신이 아닌 서민들의 무덤, 5분 걸으면 그 중 4분을 오르막을 올라야 하는 지옥의 헬스장 등의 감상을 갖게 만들었다. 뒤로 갈 수록 부정적으로 변하는 것은 그러려니 하자. 아무튼 샌프란시스코를 진심으로 즐기고 싶다면 일단 교통수단을 이용할 돈을 아주 넉넉하게 준비하는 것이 좋다. 걷다가 열사병으로 죽기 싫으면.
 샌프란시스코의 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이미 유명한 여러 가지가 있다. 뮤니 교통 패스, 클리퍼 교통 카드 등이 있는 상황에서 나는 클리퍼 교통 카드를 선택했다. 그렇게까지 넓지 않은 (내 숙소에서 피셔맨즈 와프까지는 고작 도보로 1시간 20분 정도가 걸렸다) 도시, 밖으로 나다니는 것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않는 나의 성격상 평범하게 클리퍼 카드를 이용하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뮤니 패스는 1일권, 3일권, 7일권으로 나눠 원하는 만큼 샌프란시스코를 돌아다닐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바트라는 전철을 이용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연속된 날만 사용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애초에 그 가격이 그렇게 낮지도 않다. 케이블카를 무한으로 타고 싶은 사람이라면 쓸만하겠지만, 케이블카의 줄을 기다려보면 절대 할 짓이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이렇게 생겼다.


 그렇다. 케이블카라는 낭만에 찌든 사람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지 상상해보자. 한 번 샌프란시스코에 들른 김에 케이블카에 한 번 매달려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흔하겠는가? 그래서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서는 평균 1시간 반(평일 오후 기준), 30분(평일 오전 기준)을 기다려야 한다.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평일에 도착했지만 그럼에도 이 웨이팅을 견디다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됐다. 만일 주말에 케이블카를 타고 싶다면 평균 2시간 정도는 각오하자.
 아무튼 샌프란시스코의 교통은 정말로, 나쁘지 않다. 걸을 일을 고의로 만들지만 않는다면 그렇다. 케이블카부터 다양한 노선의 경전철, 버스 종류도 다양하며, 바트까지. 그야말로 제발로 걸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 된 도시다. 교통 수단의 관리 자체도 매우 잘 된 편이기 때문에 노숙자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광경도 그렇게 잦지 않으며, 많은 사람들이 마음 놓고 교통 수단을 이용하고 있었다(그와 별개로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 자체의 치안이 썩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어디에나 노숙자는 있으니까 주의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됨!).

 

케이블카를 타고 지나온 길들. 얼핏 보면 평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까마득한 오르막과 내리막이다. 샌프란시스코는 이런 오름이 정말로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의외로 개인 교통 수단을 선호하지 않는다.


 또, 전철 중에서 공항을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인 바트의 경우 굉장히 요금이 비싸다. 다행히도 항상 비싼 것은 아니고 어디 멀리까지 가느냐에 따라 요금이 달라지는 게 장점이긴 하다. 그래도 나는 10불이나 나왔다. 정말 무서운 도시다. 공항철도를 한 번 타는데 요즘 환율 기준 + 수수료로 14000원이 나간다고 생각해 보자. 이래서 집나가면 개고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Fisherman's Wharf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를 고르라고 하면 보통 이곳이 나올 것이다. 그만큼 이 공간은 많은 역사와 사람들의 발걸음이 녹아 있다. 이곳을 기점으로 운영되는 교통 수단도 상당히 많다. 당장 샌프란시스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케이블카가 이곳을 종점으로 다니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케이블카 지옥도 피셔맨즈 와프에 도착한 후에 본 광경이었다.

 

꽃게가 마스코트인 것 같다. 보면 배고파진다.


 그래도 랜드마크 거리인 만큼 다양한 볼거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저번에 다녀온 시애틀의 재래시장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우선 이곳은 바닷가에 있는 만큼 실제로 일을 하고 있는 어부들과 고기잡이용 선박의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고, 조금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바다를 바라보면 사람들의 활기가 그대로 피부에 전해져 온다. 물론 이곳도 역시 인간이 싫은 사람이 오기에 적절한 장소는 아니지만, 경치에 포커스를 맞추더라도 큰 문제가 되진 않게 느껴진다..
 사실 이곳에 오지 않으면 샌프란시스코를 제대로 즐긴 것이 아니라는 회의적 태도의 수기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단적으로 말하건대, 사람에 따라 다른 부분이라고 하겠다. 이곳은 분명 사람들의 활력과 (조금 오염되어서 탁한 옥빛으로 변해버린 탓에 인간의 환경 오염의 심각성에 대해 깨닫게 만들긴 하지만 일단은 볼만한) 바다를 즐기기 좋은 곳이지만, 반드시 와야 하는 곳은 아닌 것 같다.
 물론 한 번 와봐서 나쁠 것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실제로 쇼핑을 잘 즐겼다. 하지만 볼거리가 많다 + 물가가 비싸다는 뭐다? 거지가 된다… 돈을 잘 챙기도록 하자.

Cable Car Museum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냥 구경하기에 좋은 곳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케이블카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샌프란시스코의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기술력과 역사를 자랑하기 위해 만들어둔 곳이지만, 나라 하나의 역사가 기원전까지 거슬러가는 일이 흔한 아시아의 민족으로서 "그렇구나…" 이상의 반응은 나오기 어려우니 뭐 크게 기대하진 않아도 좋다.
 물론 수많은 톱니바퀴와 부품들이 맞물려 굴러가는 케이블카의 모습은 꽤나 장관이고,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근대적인 풍취가 있다. 그리고 이 박물관은 그 부분을 정확히 잘 찔렀다고 할 수 있다. 밑에서는 실제 케이블카와 관련된 각종 공정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견학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이 끝내주게 바빠 보인다.

 

Golden Gate Bay Cruise

 우선 탑승하면 부드러운 여성 투어 가이드의 음성(녹음됨)이 쉴 새 없이 가이드 정보를 읊어준다. 이 다리는 어쩌고, 이 샌프란시스코의 역사가 어쩌고, 놀랍게도 하나도 안 들린다. 파도가 배에 부딪히는 소리나 배가 기동하면서 울리는 엔진 소리가 훨씬 세기 때문이다. 마치 한국 영화의 쓸데없이 큰 음향 효과에 등장인물의 대사가 다 파묻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투어의 투어 가이드를 듣고 싶다면 우선 이 지옥의 엔진음에서 도망쳐야 하는데, 내가 배를 한 바퀴 1층 2층 다 돌았는데도 여성분의 목소리가 엔진음을 이기는 곳은 없었다. 그냥 설명은 포기하는 게 마음 편하다는 걸 깨닫고 이어폰으로 음악이나 들으며 경치를 즐겼다.

 

멋진 배, 그리고 멋진 성조기의 모습. 바다는 조금 오염된 것 같았다…


 이 크루즈 투어의 이름의 출처는 명확하다. 샌프란시스코와 소살리토를 연결하는 거대한 다리, 골든 게이트 교를 둘러 지나가기 때문에 골든 게이트 베이 투어인 것이다. 정말 멋진 다리임이 자명하지만, 멀리서 보기에는 광안대교가 쪼끔 더 멋있다. 저 골든 게이트 교도 밤이 되면 불을 뿜는다는 얘기가 있지만 아무튼 내 눈에는 안 보이니 광안대교가 이겼다. 물론 이 골든 브릿지 뷰의 규모와 크기, 높이 등은 감히 다른 것들에 비할 수준이 되지 않지만.

 

그래도 나름 멋있었다. 날씨가 나빴던 게 너무너무 아쉬웠을 정도로.


 여름의 미국은 그야말로 살인적인 더위를 뽐내기 때문에, 적당히 흐려서 태양빛이 가려진 날 바다를 가르며 빠른 바닷바람을 맞는 건 좋은 선택이라 볼 수 있겠다. 머리가 다 틀어지긴 했어도 더위에 찌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정도의 강한 바람이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멀미를 유발할 정도의 덜컹거림이 심하진 않다. 물론 나는 뱃멀미가 전혀 없다시피 한 사람이므로 객관성은 없는 정보지만…) 거대한 다리의 밑으로 가로지르는 동안 종종 맨몸으로 보트나 보드를 타는 사람들이 보이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여름이라는 느낌을 제대로 받고 싶다면 강하게 추천 가능한 코스.
 1층에는 바가 있는데, 칵테일도 팔고 맥주도 팔고 그 외의 음료수나 간단한 간식거리를 판다. 크루즈를 타면 역시 칵테일을 한 잔 마셔주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 나는 체리 칵테일 한 잔을 마셨다. 무드 있긴 했지만 바람에 달달 떠느라 그렇게 좋은 선택 같지는 않았다. 위에서는 낭만적인 것처럼 적어두긴 했지만 바람이 정말, 아주 심하게 강하므로 내가 추위에 정말 조예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날씨에 대해서도 고려해두는 게 좋을 것이다.

 

내가 탔던 케이블카의 모습. 정확히는 저 케이블카 다음 다음 다음 다음 정도의 케이블카를 탔다. 기다리기 고역이었다.


이젠 마치기도 귀찮군...
대충 돌아다니면 일지가 자동으로 써졌으면 좋겠다....

 

야생의 시테양요가 사진에 찍혀 있다. 사망하기 일보 직전인 것 같다. 이래서 체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알려준다.

 

미국 여행을 한다는 것…

 나는 캐나다에서 미국에 왔다. 정확히는 세계에서 물가가 살인적이기로 1~4위 사이에서 잘 내려가지 않는 두려운 도시, 밴쿠버에서 왔다. 그 말은 곧 지옥에서 다른 지옥으로 브레이크 댄스를 추며 내려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난 밴쿠버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다. 쪼마난 공원 하나 들어가는 티켓이 8만원씩 하는 걸 보며 저주도 해보고, 한 끼 2~3만원씩 꼬박꼬박 들어가는 것에는 급기야 해탈했다. 한국에서 오천원 하는 포크 커틀렛이 20달러에 팔리는 것을 보고는 간악한 자본주의의 화신들이 모인 도시, 현대 경제 불균형의 주 원인, 인플레이션 노예들의 무덤, 이러니까 노숙자들이 사회 문제가 되는 거임 등등의 표현으로 조지게 욕을 하며 살았다.

 하지만 그 도시조차도 미국에 비하면 돈요정들의 투정이었던 것이다. 기념품점 연필이 10달러 하는 시애틀에 오고 나서 깨달았다. 세상은 넓고 물가는 비싸며 한국 돈의 가치는 쓰레기니까 나는 그냥 평생 한국에서 사는 편이 낫겠다는 것을… 그리고 마침 한국의 화폐 가치가 국제 시장에서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 된 지금 같은 꼬라지에 해외 여행을 나선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 민낯을 파헤친 다음에야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후회하기는 늦었다. 이렇게 된 이상 거지가 되더라도 여행은 즐길 각오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물론 미국에서 무서운 게 돈만은 아니다. 입국 심사를 할 때 보디가드가 아닌 심사원들의 허리춤에도 권총이 있는 것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나는 맨발로, 혼자, 총기 사용 허가가 민간인에게 내려지는 나라에 들어서는 것이다. 사실 미국 여행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겪는 고민이기도 할 거다. 이 북아메리카 치안의 나락을 상징하는 나라에서 여행이 가당키나 한 일인지?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미쳐서 내 1차 목표는 '살아남기'가 됐다. 

 

밴쿠버에서 시애틀로 향하는 FlixBus 안에서 찍은 사진. 청량한 바다가 나무 사이로 보인다. 역시 바다는 멀리서 봐야 아름답다.

 

 각설하고 미국에 오자마자 한 달 동안 사용할 한 달짜리 핸드폰 요금제부터 결제했다. 내가 이용한 곳은 'Verizon' 통신사로, 어째서인지 LG 핸드폰은 전화가 불가능하고 LTE만 사용할 수 있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세상에, 요즘 시대에 글로벌 유심 전화 연동이 안되는 핸드폰이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데이터라도 쓸 수 있는 게 천만다행이긴 하지만.

 보통 미국에서는 T-Mobile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고 한다. 효율도 여기가 훨씬 좋다(12GB짜리가 있어서 굳이 무제한 요금제를 결제하지 않아도 됨. Verizon은 5GB 다음 바로 15GB라서 조금 아까웠다. 그래서 핫스팟도 쓰고 동영상도 막 틀고 한 달 안에 다 쓸 수 있도록 눈에 불 키고 씀). 나도 처음엔 이곳에 갔지만, 이곳은 데이터도 전화도 연동이 되질 않았다. 이래서 LG는 안 됨. 이 쓰레기 같은 호환성을 봐. 대박임…

 

 

시애틀

 미국하면 떠오르는 각종 다양한 문제 중 하나로 떠오르는 교통. 하지만 시애틀에는 해당사항이 없다. 신기할 정도로 다양한 노선의 전철, 촘촘하게 잘 짜여 있는 버스 노선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시애틀의 교통은 'Orca Card'라는 것으로 이용할 수 있는데, 버스 안에서는 살 수 없고 전철역에서 기기를 이용해 새로 발급이 가능하다. 나는 어차피 3일만 있을 것이라 사진 않고, 대신 버스에서 일일권을 샀다.

 버스(시애틀의 버스는 대부분 King County Metro라는 회사에서 운영하고 있다.) 에서 2.75달러를 지불하면 해당 회사에서 운영하는 대중교통에 자유롭게 환승할 수 있는 일일권을 지급한다. 이것을 버스 기사들에게 보여주면 "Welcome!"를 외치면서 친절하게 버스에 태워주는 구조다(물론 Welcome을 안 외쳐주는 버스 기사가 더 많다).

 

요로코롬 생겼다.

 

가끔 버스가 앞문을 열지 않고 중간 문만 여는 경우가 있는데, 그 경우에도 그냥 침착하게 타면 된다.

 

 

Pike Place Market & Farmer's Market

 스타벅스 1호점으로 유명한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유감스럽게도 스타벅스를 불매하는 나는 그곳을 들르지는 않았지만, 그와 별개로 다양한 건물이 합쳐진 한국의 재래시장 느낌을 내는 곳이라 볼거리가 많다는 점은 좋았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있다. 이곳은 서술한 대로 미국의 스릴 넘치는 물가가 그대로 반영된 시장이라는 점이다. 볼거리가 많음 + 비쌈을 합하면 = 거지가 됨이다. 그래서 나는 거지가 됐다. 여행 첫 날만에 거지가 된 경험은 처음 해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퍼블릭 마켓과 내가 들렀던 식당.

 

 사실 이곳은 돈이 없으면 딱히 들르기 좋은 여행 장소는 아니다. 내가 거지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에는 아주 많은 기념품점은 물론이고 식재료, 옷, 그 외 당신이 상상하는 무엇이든, 가끔은 저게 정식 물품인지 옆동네에서 아무렇게나 뜯어온 바닥재인지 헷갈리는 후레한 물건까지 판다. 사람도 파나 의심 될 정도다. 

 하지만 아이 쇼핑을 멋지게 즐기는 문화 시민이 아니라면 이곳은 단순히 인간이 더럽게 많은 피곤한 장소에 지나지 않게 느껴진다. 퍼블릭 마켓 센터+파머스 마켓 사진을 찍는 것은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쇼핑을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고, 체력이 정해져 있던 사람이라 이곳에 온 걸 5% 정도 후회했다. 그러니까 혹시 여행 일정을 잡을 때 자신의 체력을 과신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냥 여행 일정에서 쿨하게 빼버리더라도 큰 문제가 느껴지지 않을 듯하다는 감상이었다.

 그래도 나에게는 나름 의미가 있는 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감자튀김+더럽게 맛대가리가 없는 퍼석퍼석한 고기의 햄버거 런치가 20달러(현재 환율+수수료 포함 3만원)임을 보이고 돈을 정승처럼 벌어 개처럼 쓰는 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 알려준 식당에 예를 표하기로 한다. 앞으로는 그냥 맥도날드를 가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포권!  

 

 

Chihuly Garden & Glass

 워싱턴 주에서 태어나 세계적인 유리 공예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데일 치훌리(Dale Chihuly) 씨. 그 예술가의 작품들을 모아놓은 곳이 바로 치훌리 글래스 앤 가든이다. Glass Forest - Northwest Room - Sealife Room - Persian Ceiling - Mille Fiori - Ikebana&Float Boat - Chandeliers - Macchia Forest - Glass House - Glass Garden 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는 장소로, 나름 방마다 테마가 상세하게 잡혀 있고 또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유리 공예하면 보통은 백조 같은 집안 장식품이나 실생활에 이용 가능한 공예품을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곳은 인간을 세 명 정도 세로로 세워야 닿을 만한 거대한 공예품부터,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미를 탐하는 모양새까지 존재했다. 가끔 위대한 크툴루와 same energy인 공예품들이 보이긴 했어도 계속 지켜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매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는 점까지 same energy라서 중간부터 집중이 안 됐다.

 아무튼 그와 별개로 이 모든 것들이 정말 유리로만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홀린 듯 빠져드는 장황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무척이나 좋아할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머리가 사특한 것으로 가득찬 사람이라면 잡생각이 들기 좋으니 주의할 것. 아니 그런데 정말 모독적이지 않아? 자고 있으면 저 깊은 르뤼에에서 나를 부를 것 같다…

 

 

Space Needle

 처음 들어서면 '이 탑 반지름이 꽤 길구나' 생각을 하게 된다. 랜드마크 답게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는 것이다. 물론 아주 기초적인 수학적 지식에 의하면, 반지름이 긴 원은 주로 지름도 길고 원주도 길다. 이건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스페이스 니들의 원주를 빙 둘러 줄을 서야 하는 사람에게 있어 매우 가혹한 처사라는 뜻이 된다. 대부분의 랜드마크가 그렇듯이 이곳도 예약 시간대로 사람을 순순히 들여보내주지 않는다. 절대로.
 그렇다고 해서 기다리는 시간이 마냥 지루하냐면 그건 또 아니다(지루하지 않다고는 안 했음). 옆에는 스페이스 니들이 완공되기까지의 과정과 역사에 대한 읽을 거리가 있고, 줄만 잘 선다면 옆의 안전대를 잡고 아래층을 내려다볼 수도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더럽게 심심했다. 갈 예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현대 문물에 적응한 엄지족답게 핸드폰 충전을 철저히 시켜두기를 추천한다. 나는 까먹고 충전을 반만 하고 가서 약 30분의 시간 동안 필사적으로 반야심경을 외우며 우주와 세상과 나에 대해 의미 없는 철학적 고찰을 했다.
 '스페이스 니들'이라는 이름 답게, 이 건축물은 처음 설립될 때부터 꾸준히 미래적인 디자인과 기술을 뽐내 마케팅을 진행해 왔다. 약 370일이라는 당시대 치고는 꽤 긴 완공 기간, 결코 낮지 않은 높이, 멀리서 찍으면 정말 우주인이라도 내려올 듯한 디자인 등 포인트를 잘 잡긴 했으나 이젠 구시대의 유물 비슷한 랜드마크가 되어가고 있다. 물론 살다 보면 언젠가 정말 스페이스 니들이 우주와 지구의 접점이 되기도 하겠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다는 게 내 감상이었다.

 

복작복작함


 아무튼 엘리베이터에 올라서면 그 때부터 높은 전경을 볼 수 있다. 시애틀이 한 눈에 보인다고 하지만, 볼만한 것은 바다쪽, 그리고 스페이스 니들을 비롯해 시애틀의 이미지를 근미래-SF화 시킨 높고 삐까뻔쩍한 건물들 쪽 뿐이다. 나머지는 낮고 조금 못생긴 건물들의 집합체라서 그렇게까지 보기 좋지는 않았다. 스페이스 니들은 입장료가 낮-저녁시간대 기준 성인 1명에 39달러로 그렇게 낮진 않은데 그에 비해 볼만한 것이 그렇게 특출나단 이미지는 아니었다. 

 물론 불호평이 있으면 호평도 있기 마련. 스페이스 니들에 있는 와인 바와 카페에서는 나름 분위기 있는 마실 것들을 판다. 나는 빈센트 샤도네이를 10달러 주고 마셨고, 친구 하나 없이 600피트가 넘는 높은 상공에서 시애틀의 바다를 바라보며 싸구려 잔에 와인을 담아 마시는 짭-광공 체험을 했다. 1. 친구 없음 2. 발 아래 세상을 두고 있음 3. 와인을 마심 4. 성격이 좋지 않음 5. 귀여운 유사 피앙세를 데리고 있음 대부분의 조건을 만족했지만 6. 돈이 많음을 만족하지 못해 찐-광공은 아쉽게도 되지 못했다. 

 이러나 저러나 시애틀의 정경은 썩 나쁘지 않으니 한 번 보기에 나쁜 장소는 아니다. 와인을 마시면서 투명한 울타리의 반투명한 의자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경험은 나름 돈값을 한다는 느낌이다. 스페이스 니들은 야경이 좀 더 볼만하다는 평을 듣긴 했지만 너무 피곤하기도 하고 또 시애틀의 저녁 이후 치안이 그렇게 좋지 못하다는 정보 때문에 적당히 저녁에 걸쳐 다녀왔다. 일단 허투루 랜드마크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그걸로 된 듯?

 

일단 마시긴 했는데 막 고급 와인 이런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고급이고 아니고가 뭔 상관이란 말인가. 맛있음 됐지…

 

 물론 딱히 '스페이스'스럽진 않다. 그런 까마득한 유잼을 원한다면 두바이로 가도록 하자.

 

 

마치며

 

 

 돌아오는 길에 그린 호에 잠깐 들렀는데, 생각한 것 이상으로 아름다웠던 기억이 난다. 푸른 호수 위로 보트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 카누를 젓는 사람들이 종종 보이기도 했다. 시간이 널널하다면 나도 카누를 한 번 타보고 싶긴 했지만, 혹시라도 물에 빠지면 그대로 퀵사망할 미래가 눈에 선해서 굳이 시도해보는 모험을 하진 않기로 했다.

 그래도 만화처럼 새파란 호수는 너무 아름다워서 보는 사람의 기분이 좋아진다. 사실 오늘 들렀던 다른 어느 곳보다도 그린 레이크 파크에서 찍은 사진 몇 장이 가장 마음에 든다. 원래부터 인물 사진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있어 마음의 안정을 주는 아주 드문 사진이다. 사진… 잘 찍지는 못하지만…

 

광인 같은 인형 하나만 있으면 분위기를 잡을 수 있따.

 

 아무튼 일지 썼으니 이제 씻고 발닦고 짐챙기고 새벽 비행기 타러 나갈 준비 해야댐… 이 일정 좀 봐… 누가 짰는지 몰라도 진짜 미친 놈 같아 누가 시애틀 공항에 아침 7시까지 타임어택을 하냐고요(놀랍게도 내가 했다).

4℃ / 12h / 250ml

 

 

 

격조하였습니다. 오늘은 3월 16일입니다. 참고로 저 차는 9일에 넣어서 10일에 꺼내 마셨습니다.

오늘의 교훈은 차일기를 미루지 않는 사람이 되거나 미루더라도 cool하게 넘기는 사람이 되자 입니다. 저처럼 미룰때마다 차일기 쓰면서 머리쥐뜯고 오열하지 마시기를... 

 

아무튼 일주일 전에 마신 차는 Heath&Heather 브랜드의 모닝타임.

나는 너무 당연히 Health&Healther로 알고 오~ 건강&더 건강 차 영국사람들 네이밍센스 개웃기네 이러고 있었는데 히스앤헤더였다...

건생님이 같이 보내주셨던 차! 사이다 냉침이라는 듣도보도못했고 맛있어 보이는 레시피를 전달받고 바로 냉침을 시도하기로 하는데... 가 지난 이야기.

 

 

 

 

 

 

차를 마실때 차를 만드는 사람의 지능도 준비물이라는 걸 알 수 있다는 사진이다.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어서 서치하다 통에 티백을 넣고 거꾸로 세우라는 네이버의 글을 보며 시도했는데, 새벽이라 머리가 제대로 안 굴러가서(변명중임) 티백 종이실을 그냥 밖으로 빼고 잠가버렸다.

물론 저따구로 하면 사이다가 샙니다. 네. 아주 많이 샙니다. 정말 많이 샙니다. 네... 어쩐지 글에 라이언이 있더라 라이언이 있는 글은 믿으면 안 되는데... 

 

양도 저거 하나만 달랑 넣으면 안 될 것 같았는데 슬프게도 칠성사이다가 집에 한 캔 밖에 없었다. 닭갈비 시켜먹는데 사이다 서비스를 준다길래 시켰더니 저거 하나만 꼴랑 갖다준 배달의 민족에 전적으로 잘못이 있다.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아무튼 내 탓은 아닌 듯하다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세상에 나오는 데 성공한 모닝타임(사이다)의 영롱한 빛깔을 보며 감탄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개떡같이 길렀는데 찰떡같이 잘 자란 자랑스러운 자식 보는 느낌이다. 부엌에서 뭐 하나 만들 때마다 이런 기분을 느끼는데 역시 인생에 결혼 같은 건 필요 없는 것 같다.

물론 이렇게 자화자찬하고 있다는 건 끝내주게 맛있었다는 뜻이고…

 

첫맛은 시원하고 달짝지근한 사이다인데 목 뒤로 넘길때 향긋한 차향이 훅 올라오는 느낌. 놀라울 정도로 합이 괜찮다! 너무 맛있어서 통째로 사고 싶은 차 리스트에 넣어버린 편... (하지만 이걸 마시려면 사이다도 고래처럼 마셔야 할 것 같아서 고민이 된다)

사이다 냉침법이 의외로 어울리는 차가 많다던데 틀어본 김에 이거저거 더 해보고 다른 차들도 시도해보려고 한다.  

냉침법 자체도 아직 낯설고 신기하고 생소한데, 뭐에 담그냐에 따라 이렇게 맛이 각양각색이라는 것도 꽤 신기한 일인 것 같다. 세상에 차도 너무 많고 차를 마시는 방법도 너무 다양하다...

오래 살고 많이 먹읍시다... 행복합시다...

 

 

 

 

 

 

4℃ / 22h / 500ml

 

 

 

냉장실에서 22시간에 500ml이라고 대략적으로 적어두긴 했지만 고백할 것이 있다.

~자세한 시간과 양이 기억이 안 납니다~ 여러분은 부디 부지런한 시음기를 쓰세요.

아무튼... 오늘 올릴 티타임 후기는 루피시아의 퀸즈머스캣 우롱 + 옐로우문의 ... 뭐였는지 기억 안 나는데 아무튼 맛있는 쿠키 조합이다. 텀블러의 마리 퀴리 뮤지컬 대사가 적나라하게 적혀 있는 건 당연히 영업을 위해서이다. 이 놀라운 뮤지컬은 무려 라듐색으로 빛나며 안에 무엇이 들었든 마시면 죽는 음료인 것처럼 만들어주는 최고의 텀블러 굿즈를 판다.

 

 

 

 

 

 

물론 마리 퀴리 씨의 라듐 사랑이 이 글의 주제는 아니다.

 

 

 

 

 

 

오늘의 별안간 나타나 남의 소매를 터뜨리고 멋지게 사라지기 전문 차모인은 써미님이다. 왼쪽 사진이 막 포장을 뜯었을 때의 구성이며 실로 차를 마시는 사람들에게 있어 소분이라는 건 정녕 어떤 의미일지 다시 생각하게 되는 모습이다. 그리고 난 드디어 박스 하나를 꽉 채우고 뿌듯해하는 중인데(오른쪽 사진), 막 입에 넣기만 하는 중인 내가 박스를 채웠을 정도면 진지하게 차를 수집하는 분들의 차 창고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고 두렵다. 나도 미래에 저렇게 될까...?

12월 정도까지만 해도 에그노그를 개조져서 북미에서 국가적 고소를 받을 뻔하고 홍차에 티백을 n시간씩 우려 셀프 독극물 제조기로 만드는 등 얼레벌레였는데 이제 아침에 일어나 차를 까먹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얼마 전 런던프룻앤허브 차를 마셨다가 가향차에 맛까지 실제로 들어간 경우는 드물다는 말을 들어서 의아했는데, 이걸 마셔보니 바로 가향챠의 평균을 알 수 있었다. 찻잔을 입에 대자마자 시원하고 달달하게 올라오는 퀸즈머스캣 향까지는 정말 좋았는데 맛은 우롱차에 기분 좋고 깔끔한 상큼함 정도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원래 미각에 후각이 끼치는 영향도 지대하다고 하니까 그런 효과를 노린 게 아닐까....? 아직 차를 많이 마신 편은 아니라 좀 더 가향차를 많이 마셔보려고 한다.

그 전에 일단 다양하게...

아무튼 입에 맞는 차를 찾아 떠나는 새싹의 여정은 계속된다...

 

to be continued... 

 

 

 

 

100℃ / 4min / 200ml

 

 

 

오늘의 주제 : 복숭아는 옳다.

 

 

 

 

 

 

♥오늘은 건생님께서 나눔해주신 최고의 차들과 함께합니다♥

차를 멋지게 마시는 분들이 말하는 小분의 의미란 도대체 뭘까? 이 정도의 은혜를 소분으로 부르면 중분이랑 대분은 대체 어느 정도의 양을 갖게 되는 걸까요?? 그래도...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호로롭

시음기도 올리고 받은 거 감사드린다구 인증도 할겸 가벼운 차부터 골랐다. 남은 것도 해치워버릴거시다. 입문자다 보니 당연하게도 처음 보는 차들 뿐이라 (립톤은 대중적이라서 들어본것같기도?!) 한번씩 입에 넣어볼 생각에 매우 설레 있는 중. 오늘은 과일은 안 먹지만 카페 갔을 때 복숭아 아이스티는 하마처럼 마시는 사람으로서 복숭아 핫티는 느낌이 어떨지 정식으로 궁금해졌다. 

 

 

 

 

 

 

수색이... 이 정도면 정말 짙은 편인가 싶다 (적어도 지금까지 찻잔에 따라 마셔본 차들 중에서는 가장 짙은 듯) 티백에는 온도와 시간만 적혀 있길래 물을 적당히만 넣었는데 실패하진 않은 것 같은 맛이 났다. 눈치 보다가 설탕도 쥐꼬리만큼 넣었다. 이런 차들도 통상적으로 몇 ml이면 적당합니다~ 같은 기준이 따로 있는 건지 나만 초짜라서 모르는 건지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찻잔에 입을 대자마자 코로 따뜻한 복숭아향이 훅 올라오는데, 대충 부어 마시면 나는 그 밍맹하고 시큼한 향은 아니고 따뜻한 복숭아차를 마셔본 경험 자체가 처음이라 그런지 짙은 향을 제대로 맡아보는 건 처음이라 유인원처럼 킁킁거리다 마셨다 (...) 어디까지 과일의 맛이고 어디까지 허브의 맛인지 구분할 짬은 안 되지만 아무튼 입에 맞았던 덕에 아침을 달달하게 보냈다. 

설탕은... 안 넣는 게 나았을 것 같다는 중요한 교훈도 얻었다.

 

멋진 티타임은 언제나 즐겁다...

다음엔 티푸드도 함께 입에 넣어버리겠어.

 

 

100℃ / 3min / 300mL | 4℃ / 25h+@ / 300mL

 

 

마신지는 며칠 되었지만 이제 시음기를 적는 필멸자의 모습이다. 그것도 두 개 마셨는데 둘 다 미뤄서 둘 모두 며칠 전 차다.

현대 인간의 가장 큰 적은 역시 귀찮음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냉침법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꽤나 게을렀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차가운 곳에 찻잎을 가라앉힌 물을 두고 누가 그걸 고의로 방치한다는 생각을 했을까? 100% 까먹은 게 아닐까? 아무튼 냉침차는 생전 처음 마셔보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는 게 오늘 쓸 글의 주제 1번이다. 밀크티도 처음 마셔보고 냉침도 처음 해보고 과일가향차도 처음 마셔보고 우롱차도 처음 마셔보았기 때문에(그렇다고 말하기엔 그냥 마셔놓고 그게 우롱차인지 모르고 넘어갔을 가능성이 더 높긴 함) 최근에는 인생에 새로운 도전을 해볼 기회가 꽤 늘어난 것 같고 아직도 많은 도전의 기회가 남아있다는 게 즐거운 것 같다.

 

 

 

 

 

 

오늘의 차...는 아니지만 오늘 리뷰할 차는 루피시아 메론우롱과 쿠스미 러시안 모닝. 둘 다 예섭님께서 보내주신 차들이다.

쿠스미 러시안 모닝은 단순히 모닝에 고른 차지만, 메론우롱은 처음 받아 올렸을때 지인들이 메론...? 우롱? 메론?? 우롱?? ?이런 반응이었어서 호기심이 갑자기 동했다. 아무래도 그런 반응을 보면 평범한 사람들은 더 궁금해하기 시작하니까... 특히 메론차도 우롱차도 안 먹어본 퓨어한 뇌는... 메론이랑 우롱 조합이 특이한가 싶은 궁금증이 생겨버리기 마련.

 

 

 

 

 

 

차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 마시기 전에 보통 검색을 해보는데, 우유에 냉침하니 메로나맛이 났다더라~ 하는 어떤분의 후기를 보고 충동적으로 밀크티를 시도하기로 했다. 설탕을 넣으라는 말은 없었던 것 같지만 밀크티에 설탕은 필수라는 룸메이트의 강력한 권고를 못이겨 두 스푼 정도 넣었었다. 24시간만 냉침하라고 트친들이 조언한 거 까먹고 한시간 더 우린 내가 레전드인 듯함... 결론만 말하자면 메로나랑 별로 비슷하지는 않고 우유를 너무 많이 넣어서 그런가 메론향이 조금 덜했다.(ㅠㅠㅠ) 

우롱차를 검색해보니 대체 왜 메론우롱이 이렇게 신기한 느낌일까 감이 잡혔는데, 맛이 꽤 독보적으로 특징적이랬다. 그 말대로 이 차는 시원하기도 하고 우유 맛도 나고 우롱으로 여겨지는 적당히 쓰고 떫고 차향이 우러나오는 맛도 나고 메론 맛도 났다. 아니 이게... 어우러지는 느낌보다는 그냥 입 하나에서 세 가지 맛이 전부 나는데 그렇게 이상하진 않았던 느낌.

 

 

 

 

 

 

쿠스미 러시안 모닝은 아침 햇빛이 적당히 떠오른 창가 테이블에 앉아서 책 읽으면서 마셨는데 좀 삶의 질이 올라간 느낌... 영화나 소설속 유럽사람들 생태 따라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마시면서 처음 떠올린 소감은 브랙퍼스트 티와 모닝 티는 비슷해 보이는데 생각보다 꽤 느낌이 다른가?! 싶다는 생각? 물론 이걸 더 자세히 고찰하려면 그런 이름이 붙은 것들을 다 골라 마셔봐야 할 것 같긴 하다.

티푸드가 굳이 필요한가 싶었던 사람인데(그냥 고래처럼 퍼마심) 전날에 마침 빵을 좀 샀어서 꺼냈더니 맛이 깔끔하게 잡히는 게 막입에도 실감날 정도라서 아 이래서 사람들이 굳이 티푸드를 같이 먹는구나 싶기도 했다. 배워가는 것도 맛있는 것도 많은 요즘...

꼭 차이를 찾지 않더라도 사람 자체가 일상 루틴이 아침형인 인간이라서 (tmi) 나는 이거는 아침차다~ 하고 명시된 것들이 입맛에 맞는 것 같다. 기분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소감은 그런 듯함.

 

 

 

 

 

 

살짝 tmi인 이야기지만... 위의 사진들은 이사온 집앞에 마침 샐러드 전문점이 있길래 끼니로 신나게 먹고 있는 샐러드다. 그렇게 고급지고 싱싱한 맛은 아닌데 구성에 비해 가성비는 훌륭한듯. 고기랑 야채랑 입에 욱여넣고 빵 하나 차 하나 꺼내서 마시는 게 앞으로의 루틴이 될 것 같다.

이탈리안 레스토랑 가서 리코타 치즈 듬뿍 올라간 파릇파릇한 샐러드 먹고 싶다. 세트로 시켜서 다른 친구들 파스타랑 피자 먹을동안 샐러드 독점하고 싶다는 광기에 빠지는 나날... 코로나 죽어...

 

 

 

100℃ / 3min 20sec

 

 

 

차에 관심을 갖(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하)게 된 지 강산이 천 번 뒤바뀌고 나라가 오십 번 건국되었다 멸망하고 황도 경사각이 변동하기 시작한 수준으로 까마득한 시간이 흘렀다. 나는 드디어 정확한 시간 양 온도를 맞춰 홍차를 즐겨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문4년 나이 5만 살의 일이었다.

 

 

 

 

 

 

멋진 홍차인 예섭님께서 차를 소분해주신 덕분에 받은 김에 받은 만큼은 열심히 마셔봐야겠다는 의지가 붙었다. 근데 저는 이것을 小분으로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지는 중입니다.

본격적으로 이것저것 사기까진 엄두가 나지 않아 다시백을 사서 우리기로 했다. 평소에 워낙 개판으로 티백을 우려왔기 때문에 걱정되셨는지 몇분 몇ml 어떤거는 어떻게 저떤거는 저렇게 전부 적어주셨다 ㅠㅠㅠㅠㅠㅠ

오늘 고른 차는 T2 맬버른 브랙퍼스트 : 무려 호주 직구 차다! 고른 이유는 간단하다 : 가장 이름이 멋졌기 때문이다.

 

 

 

 

 

 

가향이 정확히 뭔지도 모르고 있고 없고의 차이도 잘 모르긴 하지만... 검색해보니 바닐라 향이 첨가된 차라고 한다 '0'! 서치는 일단 입에 넣어본 다음 해서 (...) 뭔가 담백하고 부드러운 맛이 있었는데 이거였구나~ 하고 막연히 느낄 수는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입에 착 붙는 느낌이라서 고래처럼 마셨다. 두 번 타면 맛이 써진다고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답게 냠냠이 킵고잉 했는데, 사실 막입이라 그런지 뭔가 달라진 건 모르겠고 그냥 맛있게 마셨다. 세 번째부터는 물 끓이지도 않고 그냥 부어 우려서 마셨다. 아무래도 내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 같다.

 

아무튼 소감을 말하자면 대만족이고, 1회용분만 소분받아서 당장 더 먹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마음에 들었으므로 언젠가의 추가구매를 위해 기억에 남겨두기로 한다 ^3^

 

 

 

 

 

+

 

차모분들을 열심히 눈팅해가면서 뭐라도 해보려고... 했으나... 결론적으로 실패하게된 바 차모님들의 힘을 빌리고자 합니다... 원기옥은 괜찮으니 팁 약간만 주시면 신나게 헤드뱅잉을 할 거예요... 지금 정말 아는 게 너무 없는 나머지 본인이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망충한 상태로 서서 ㄴㅇㄱ 포즈 취하는 중이랍니다

입문용으로 무난한 차를 추천해주시거나... 이런저런 차를 소분판매해주시거나... 이것저것 같이먹기 좋은 티푸드라거나? 그냥 차 관련 얘기라거나? 모죠 표정으로 서 있는 홍차새싹을 주워가보실 분? 

저... 은혜 잘 갚는 편이니까요...(과연)

 

 

 

 

 

사실 우리 집에는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4000~5000원대의 저렴하고 맛있는 티즌 티백이 많다. 

차를 그렇게 자주 마시는 편은 아니고, 기왕 마시는 거 분위기 있게 먹고 싶다는 일념으로 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찻잔을 빌려 차를 우리기로 했다.

이것을 다짐하고 티백을 넣은 시간이 9시 정도였다.

참고로 이 글은 오후 1시 40분에 적히고 있다.

 

 

 

 

 

저 영롱한 색을 띄고 있는 사진의 자스민 차는 놀랍게도 1시간 우려진 상태의 차이다.

당연히 식었고, 당연히 쓴 향이 올라왔고, 보정빨이 잘 받아서 그렇지 실제로 보면 누룽지 같은 색을 띄었었다. 차 끓여놓고 고기 좀 굽는다고 방치한 게 화근이었다. 다 먹고 설거지하고 소파에 누워 해리포터가 트리위저드에 끌려가는 것까지 구경한 뒤에야 차를 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재앙은 그 단계에서 멈추지 않았다. 1시간 우린 차의 상태가 생각보다 양호해 보이자 더 우리면 어떻게 될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먹느라 음식 사진을 남기지 못하는 성질머리상 사진은 남지 않았지만, 9시 가량부터 1시 30분까지 대략 4시간 30분 정도를 우려진 차를 마시는 건 인생에 한 번의 경험으로 족한 것 같다. 그 맛에 대해서는 별로 서술하고 싶지 않다.

네 차에 독은 개나소나 탈 수 있다. 진정한 독은 게으름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한 번은 정상적으로 먹어야 시음기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했는데, 실수로 (말하자면 길다) 티백 컵 안에 미지근한 정수를 부어버리는 바람에 다시 망한 차가 되었다. 멀쩡하게 차를 우리려는 시도조차 무산되었다.

삶은 차 한 잔을 마시는 것조차 쉽지 않다. 차 한 잔의 여유라는 건 다 저세상 얘기다. 나는 차를 마시는 것조차 전쟁이다.

그래서 그냥 먹태포나 구워서 마요네즈에 찍어 먹기로 했다. 

 

맛있는 먹태포 구이는 배신하지 않는다.

껍질도 잘라드세요!

짱!